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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 생생 후기

2023 일·생활 균형 근로자 우수사례 수기 공모전 [최우수상-서OO]
등록일
2023-12-12
조회수
4,158
내용

1시간의 나비효과

 

8시 40분. 지하철 플랫폼에 도착하자, 안내 방송이 들린다. “철도 공사의 파업으로 지하철이 잠시 지연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예전이었다면 조금 더 일찍 나올걸 그랬나, 혹은 팀장님께 미리 보고드려야 하나,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아침부터 스트레스 받으며 초조하게 지하철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직장은 유연 근무제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스타트업 회사로 이직한 6년 차 직장인이다.

그동안은 9 to 6로 출퇴근하는 제조업 기반의 회사에 다녔었다. 9시부터 18시로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다 보니, 아무도 눈치를 주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보상받을 수 없는 ‘에누리 근무’를 하고 있었다. 가령, 9시 출근이니 예의상 혹은 출근길에 돌발상황이 생겨도 지각을 안 하기 위해, 8시 40분까지 출근하거나, 퇴근은 분명 6시이고 오늘 할 일을 다 했는데 아무도 일어나지 않아 예의상 6시 20분 정도까지는 의례 내 근무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그 이후가 되어야 슬쩍 일어나서 내일 뵙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며 신속하게 사라졌었다.

회사 분위기나 같이 일했던 동료들 모두 좋았고, 눈치를 주지 않는 편이었지만 나 혼자만의 직장에 대한 예의를 지키느라 불합리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에누리 근무’를 사회생활의 일환이라 생각하며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약 3개월 전, 다른 업계로 도전을 하고 싶어서 이직하게 된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근태의 맛’을 보게 되었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사세가 급격히 확장되고 있는 9년 차 스타트업 회사이다.

직원 수는 100명 이상으로, 유연 근무제가 잘 정착되어 있다.

우리 회사에 정착된 유연근무제는, 9-10시 사이에만 출근하면 퇴근은 소정 근무 시간인 8시간을 채운 뒤 자유롭게 하면 되게 되어 있다.

처음에는 이 제도가 그냥 ‘스타트업의 느낌’을 보여주기 위한 제도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아침 한 시간이 나의 생활 패턴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놓았다.


출근 첫날, 왠지 긴장하면서 9시 반쯤 출근했는데 9시 40분쯤 다른 팀원이 왔고  50분쯤 팀장님과 나머지 팀원들이 도착하셨다.

OJT도 받고 이것저것 공부하니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6시 반쯤 얼른 퇴근하라고 팀장님이 재촉하셨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팀원들의 눈치를 보며 남아있었다. 40분, 50분이 되자 나머지 팀원들과 팀장님도 자신의 할 일을 다 끝내고 출근한 순서대로 퇴근하시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팀장님과 팀원들의 재촉에 못 이겨 ‘에누리 근무’ 없이, 출근 시간 8시간 이후에 내 업무 마무리 후 바로 퇴근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팀원들, 회사 동료들이 자신의 스케줄대로, 또는 각자의 교통 사정에 맞춰 출퇴근을 조절한다는 것에 완벽 적응했다.

누가 언제 출근하는지는 본인만 알 수 있으므로, 점점 서로가 언제 출근하는지, 퇴근하는지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어련히 자기 일 다하고 퇴근하시겠지 하면서 나도 내 스케줄에 맞춰 퇴근할 수 있도록 일을 밀도 있게 하려고 내 일에만 신경 쓴다.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일하고 있고, 실제로 업무에 아무 지장도 주지 않으니 동료 간의 믿음도 생기는 것 같다.

또한, 나도 출퇴근길 교통 사정에 맞춰 나만의 출퇴근 스케줄을 만들었다.

나는 9시 40~50분 사이에 출근하고 있는데, 요새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9시 출근 - 6시 퇴근하는 직장이 대다수인 만큼 8시~9시 사이의 출근길은 ‘지옥철’이다. 그래서 8시 50분쯤에 집에서 나와 약 50분 정도 이동 후, 회사에 9시 40~50분 쯤 도착한다.

이제는 지연되는 지하철에 기분이 나쁘지도 않고, 환승역에서 앞 사람이 느리게 걸어서 지하철 문이 내 앞에서 닫혀도 괜찮다. 만원 버스에 무리해서 타려고 하지 않으며, 요즘 같은 날씨에는 버스를 타는 대신 회사까지 음악을 들으면서 천천히 걸어간다. 스트레스 없는 출근길이 가져다주는 여유라는 게 생각보다 크게 다가온다.

긍정적으로 달라진 점이 또 있다. 

내 생활 전반을 내가 조절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퇴근 후, 친구와의 약속이 7시 이후라면 아침에 좀 더 여유롭게 나와서 10시쯤 출근하면 되고, 6시라면 더 일찍 나와서 9시에 도착하면 된다. 

이런 개념이 정착되니, 퇴근하고 다른 일에 대해 도전할 힘이 생겼다.

물론 업무가 가중되지 않도록 도와주시는 팀장님의 배려가 있어 그렇겠지만 분명 ‘(비록 미세할지라도)내 업무시간을 내가 조절한다.’는 생각이 드니 퇴근 후 정기적으로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매주 월요일마다 친구들과 ‘습관 스터디’를 만들어, 내가 평소 업무를 하다가 아쉬웠던 비즈니스 영어에 관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으로 습관 스터디를 늘려가며 업무에 필요한 자기 계발을 해 나갈 생각이다.


분명, 주 4일제 혹은 35시간 근무 등 실제 근무 시간을 줄여 주는 방식은 아니기 때문에 과장되었다는 생각이 들 수는 있으나, 나조차도 업무 시작 시간을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다양한 생각이 들게 하며 나를 바꿔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언뜻 보면 사소하기도 하고 크게 혼선이 생길 만한 변화도 아니지만, 직원들을 배려하는 조그만 변화가 줄 나비효과는 분명 선순환으로 이어질 것이다. 아침마다 지하철, 버스 안에 같이 탄 사람을 미워하게 되는 출퇴근길 지옥철에서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회사에 도착하는 동료, 자기 주도적으로 업무 시간을 조절하여 발전적으로 사용하는 직원은 회사 생활의 긍정적인 활기를 불어넣을 테니까!